
물먹은 솜 마냥 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프고, 추웠다. 아득한 의식 속에서 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여름이었다. 론이 지나가는 말로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던 걸 떠올려보면 아직 자신의 생일도 지나지 않은, 분명한 여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지. 본능적으로 해리는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올려 몸 위로 덮어 보지만 얇은 여름용 이불은 때아닌 추위를 가시게 하기엔 부족했다. 해리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딱딱한 지팡이를 들고 가볍게 휘두르자 금세 방 안의 공기가 따뜻해졌다. 한동안 지팡이를 쥔 채 어정쩡하게 누워있던 해리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둘둘 몸에 감았다.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이 여름에 감기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침대에 앉은 해리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천천히 생각했다. 먼저 오러 사무국에 들러서 부탁한 보고서를 받고 임무 보고서 검토를 해야 했다. 그런 다음 특별 수사국과 함께 수사 중인 사건 파일을 드레이코와 함께 검토한 후에 수사 방향을 다시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킹슬리에게 그것을 보고할 의무도 있었다. 하필 할 일도 이렇게 많을 때 몸 상태가 이 모양이라니. 오러 일을 시작하면서 쉬어본 적이 없는 해리에게 휴가를 낸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빠르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 하루에 해리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어나서 뭘 좀 먹자. 그리고 감기약이 남았는지 찾아보고.
해리는 헤르미온느가 가르쳐준 '머리 감을 시간이 없을 때 유용한 마법'을 쓴 후 지팡이를 흔들어 머리를 말렸다. 직접 감는 것보단 별로지만 안 감는 거보단 낫겠지.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은 해리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몸은 추운데 열이 오른 얼굴은 뜨거웠다. 자꾸만 휘청거리는 몸을 참지 못한 해리는 긴 셔츠로 상의만 바꿔 입고 약을 찾아 방을 나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가 쿵쿵 울렸다. 해리가 높은 선반 위에 있는 상자를 꺼내기 위해 팔을 들었을 때,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지며 몸이 뒤로 기울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해리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토스터의 알림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해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드레이코가 오러 사무국을 찾은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해리가 오기로 한 시간이 되어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드레이코가 직접 해리를 찾으러 온 것이다.
사무실 안의 사람들에게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드레이코는 익숙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서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넨 드레이코는 국장실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포터, 있습니까?"
"국장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예상하지 못한 비서의 대답에 드레이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해리 포터가 결근이라니?
"따로 연락 온 건 없습니까?"
"네. 안 그래도 지금 부엉이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제가 가볼 테니 부엉이는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코는 플루가루를 뿌리고 초록색 불빛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은 적막했고 어쩐지 좀 더웠다. 평소라면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해리?"
벽난로가 있는 방을 나와 거실로 나가자 드레이코는 바닥에 쓰러진 해리를 발견했다.
"해리!"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빼 들고 주위를 경계하며 해리에게 다가갔다. 몇 가지 주문을 빠르게 사용해 집에 자신들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드레이코는 그제야 해리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안색이 파리하고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드레이코는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집 안이 좀 더웠던 거군.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서 온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이제 보니 상의는 긴 셔츠에 하의는 여전히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드레이코는 마법을 쓰는 대신 직접 해리를 들어 올려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해리를 눕히고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어준 후 마법부로 돌아가 비서에게 해리의 상황을 전했다. 수사 관련 파일을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해리는 정신을 차리고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드레이코."
"해리."
해리는 다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열 때문인지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아프면 휴가를 내야지 미련하게 출근할 생각을 왜 해. 그러니까 쓰러지지."
"그렇게 아프진 않아."
"그래서 그렇게 이상한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어?"
해리는 이불을 들어 제 옷차림을 보더니 민망함에 코를 찡그렸다.
"약 먹고 마저 갈아입으려고 했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쯧."
"네가 머글 속담을 나한테 써먹다니 이거 참 신기한데."
드레이코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야, 뭐. 그 모습에 철없던 드레이코의 모습이 떠올라 해리는 코웃음을 쳤다.
"뭐 좀 먹었어? 약은?"
"아니."
"기다려. 뭐라도 만들 테니까. 먹고 약 먹자."
쓰러졌던 기억을 떠올린 해리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피곤했다. 해리는 침대에 깊게 몸을 묻었다. 주방에서 드레이코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잠시 후 드레이코가 크림스튜와 약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드레이코는 쟁반을 내려놓고 해리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며 침대 옆에 앉았다.
"근데 집요정은 왜 안 보여."
"휴가 갔어."
"휴가?"
드레이코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 주인은 아픈데 휴가를 갔다고?
"반년에 한 번씩 휴가를 보내주기로 약속했거든."
"집요정이 아니라 그레인저랑 약속한 거겠지." 드레이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반년에 한 번이면 그렇게 자주도 아니잖아."
"넌 반년에 한 번이라도 휴가 못 가잖아."
해리는 스튜를 입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걔는 걔고, 나는 나지.
해리는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말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크리처를 떠올렸다. 크리처는 살면서 그런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그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레귤러스의 방을 크리처의 방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대처였다─ 감격에 젖은 크리처는 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렸었다. 지금쯤 크리처는 '집요정을 위한 쉼터'─'신비한 동물 단속 및 관리부'에서 일하는 헤르미온느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만들어졌다─에서 다른 집요정들과 휴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다 먹었어?"
"응."
드레이코는 스튜 그릇을 치우고 약을 내밀었다. 해리는 잔뜩 인상을 쓰고 약을 삼켰다. 쓴맛이 혀를 타고 전해지자 해리는 더욱더 인상을 썼다. 그의 화려했던 학창시절 덕에 먹어보았던 온갖 약들은 죄다 맛이 끔찍했다. 왜 아무도 맛있는 약을 만들지 않는 거지? 해리는 툴툴거리며 병을 내려놓았다.
"이제 좀 자. 곧 땀이 많이 날 거야."
해리가 침대에 눕자 드레이코는 그 위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드레이코는 침대 옆 탁자에 앉아 가져온 수사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다 읽었을 때 갑자기 해리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왜."
"갑자기 폼프리 부인의 감기약이 생각나서." 해리가 작게 킥킥거렸다.
"오, 사람을 증기기관차로 만드는 그 약 말이지."
"그래도 효과는 아주 좋았지. 다음에 몇 병 받아와야겠어." 드레이코의 입에서 나온 ‘증기기관차’라는 말에 어색해하며 해리는 안경을 벗었다.
드레이코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다시 파일로 눈을 돌렸다. 냉방 마법을 걸지 않은 여름의 후덥지근한 방 안은 더위를 잘 안 타는 드레이코조차 참을 수 없이 더웠다. 드레이코는 여전히 두꺼운 이불을 덮고 몸을 떨고 있는 해리를 힐끗 보았다. 드레이코는 셔츠를 걷어 올리며 파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곧 해리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해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갔을 거라 생각한 드레이코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해리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깼구나. 좀 어때."
"……더워."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치워주는 드레이코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잔뜩 맺혀있었다. 해리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땀방울이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뜨끈한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많이 덥지."
"좀. 너 옷 갈아입는 게 좋겠다. 그동안 나는 씻고 올게."
드레이코는 자신도 모르게 어쩐지 처량한 표정의 해리의 머리카락을 헝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하게 보이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묘한 느낌에 드레이코는 제 손을 바라보며 욕실로 향했다.
드레이코의 행동에 놀란 해리는 드레이코가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넓은 등이 욕실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해리는 드레이코의 손이 닿았던 곳을 매만지며 일어나서 앉았다. 드레이코는 오늘 하루 평생 베풀 친절을 다 쓸 생각인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몇 번 한 해리는 옷장에서 편한 옷을 꺼내 입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저녁 바람이 적당히 불어왔다. 해리는 영국의 여름을 제법 좋아했다. 비가 올 때 피어오르는 눅눅한 향과 외출하기 좋은 기온은 해리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들이었다. 해리가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는 동안 드레이코는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보다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왔다.
"냉방 마법 걸까?"
"아직 안돼. 다 낫지도 않았잖아."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오늘만 지나고 그렇게 해."
"너 더울 텐데."
"참을 만해."
"오늘따라 이상하게 다정하네."
해리의 말에 드레이코는 눈만 깜빡였다. 드레이코는 누군가의 옆에서 식사와 약을 챙겨주고 건강을 걱정해주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있는 해리를 보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픈데도 출근하려던 해리의 고집스러움을 차마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약해진 해리 포터는 썩 보기 좋지도 않았고 가능하면 드레이코는 다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와 해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퍽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변했고 지금도 계속 변해가고 있었다. 간호 한 번 해주는 것이 그렇게 큰일은 아닐 것이다. 드레이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건을 들어 해리의 목덜미에 남아있는 땀을 마저 닦았다. 간지러운 듯 해리의 눈꺼풀이 작게 떨려왔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코는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돌렸다.
"저녁 준비할게."
드레이코는 주방으로 들어가 재료를 찾았다. 훈제 연어 스테이크를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환자한테는 너무 과한가? 그래도 고기보단 넘기기 쉽겠지. 드레이코는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을 준비했다.
"말포이가 요리라니."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드레이코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힘이 없지만 조금 전보다는 기운을 차린 모습의 해리가 신기한 듯 드레이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초록색 눈이 불빛에 반짝였다.
"계속 누워있지."
"답답해서."
해리는 식탁에 앉아 드레이코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드레이코가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의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딱히 허락을 구하진 않았지만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드레이코가 움직일 때마다 아직 조금 젖어있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얘도 참 키가 크네. 늘 나보다 컸었지.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해리는 드레이코가 어느새 몸을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초점 없이 멍해진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드레이코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초록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그들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해리는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해리 쪽은 하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숨이 멈출 것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레이코였다.
"저녁 다 됐어."
뜨거운 숨결이 입술에 내려앉고, 드레이코는 그대로 멀어졌다. 하. 해리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맛있다."
드레이코의 요리 솜씨는 정말로 괜찮았고 해리의 입에도 잘 맞았다. 해리는 접시를 깔끔하게 비웠다. 드레이코는 잠시 식사를 멈추고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드레이코는 해리에게 다시 약을 먹인 후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
"벌써?"
"넌 아직 환자야."
드레이코는 해리의 등을 침실 쪽으로 밀었다. 불만스럽게 꿍얼거리면서도 해리는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은 안 덮을래."
"그래."
"창문은 조금 열고."
"지금 좀 어린애 같았어."
해리는 드레이코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감기로 축 처진 눈은 그렇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휘둘러 방을 어둡게 했다.
"드레이코."
"응?"
"계속 안 있어도 돼. 나 혼자 잘 수 있어."
"알아."
드레이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해리의 가슴을 토닥였다.
"와, 나 진짜 애 된 것 같은데."
"오늘만이니까 잘 대해줄 때 마음껏 누려."
"내일부터는 얼마나 괴롭히려고."
글쎄. 드레이코는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드레이코."
"또 왜."
"감기 옮으면 어떡하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니까."
"지금 내가 개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잔잔하게 머리칼을 훑고 가는 바람 속에서 드레이코의 향수 냄새가 묻어났다. 이제 진짜 자.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해리는 눈을 감았다.
간호 한 번 해주는 거, 생각보다 큰일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해리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드레이코는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그들의 조금 특별했던 여름밤이 깊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