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가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공간이 남아나는 호그와트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이 드문드문한 복도가 여럿 있다. 그렇다고 기다란 복도에 뿌연 먼지가 가라앉거나, 높은 천장에 거미가 집을 지어 과시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다른 곳보다 생기가 없어 보일뿐이었다. 특히 오늘 같이 하늘이 잿빛 일색으로 오염되고, 무거운 장대비가 땅을 때릴 때면 더더욱 고독해 보이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리 별 볼 일 없는 소외되고 음산한 곳을, 드레이코 말포이가 점심시간을 할애하며 직접 행차했다. 드레이코가 배경으로 삼은 복도의 한 면은 기둥이 줄을 서있어 야외와 구분이 없었기에 드레이코처럼 기둥에 기대있으면 땅을 튀는 빗물이, 습한 여름의 기운이 바짓단을 적셨다. 벽돌이 우둘투둘하게 튀어나온 기둥에 기대있으면 아플 법도 하건만 드레이코는 감각을 잃은 사람마냥 점심시간이 시작한 후부터 끝나기 10분 전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겨울의 망토는 벗어던지고, 여름의 후텁지근한 날씨에 대비해 셔츠와 넥타이만 입고 다니는 드레이코는 더운 와중에도 아버지가 강조하던 단정함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드레이코도 심하게 불타오르는 더위를 이길 순 없던 건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홀로 있을 때에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단추를 끄르기도 했다. 결국 오늘도 더위에 지쳐 넥타이를 내리던 드레이코는 문득, 며칠 전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제 목을 조르는 녹색 넥타이를 보면서 답답해 보인다고 했던 해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서…자신은 오히려 자신과 반대가 됐던, 넥타이를 헐겁게 매고, 셔츠 소매를 접어 팔꿈치 아래까지 올리고, 단추 한 개를 비운 해리를 나무랐다. 옷을 잘 못 산건지, 아니면 학교생활을 하면서 살이 빠진 건지 널널한 셔츠가 해리의 속살을 노출시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보수적인 이유로 말이다. 짜증이 한껏 묻어난 목소리의 시작과 동시에 해리의 셔츠 깃을 검지로 집어 옆으로 젖혔다. 가만히 있을 때에도 충분히 드러나 있던 속살은 제 손짓 한 번에 더 깊은 곳을 내비췄다. 해리가 손을 쳐내기 전에 손끝으로 쓸었던 쇄골의 굴곡은 며칠 전 혀로 훑었던 모양새 그대로 미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그 살결은 기숙사에 있는 초색 벨벳 이불을 떠올리게 했다. 부드러운 살결을 취하기도 전에 내쳐진 손은 허공을 맴돌다가 장난치지 말라며 팔뚝을 치는 해리와 다투는데 쓰였다.
그날 해리가 어느 부분에 대해서 장난치지 말라고 했는지 어느 쪽도 확신은 안 섰지만 적어도 보수적인 내 답변에 답한 것이었다면 해리가 틀렸다고 단언 할 수 있었다. 해리의 의도가 어떻든 나는 해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셔츠 속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장난이 심하고 꾀가 많은 위즐리 쌍둥이라면 더더욱 그랬고. 생각해보니까 지금 드레이코의 언짢은 기분의 근원지는 모두 쌍둥이였다. 저번 밀회 장소에 해리의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쌍둥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호그스미드에서 제 할 일도 못하고 찾아다녔던 해리가 둘에게 끌려 다니는 걸 발견했던 일, 아침부터 대연회장에서 해리의 둥지 머리에 서슴없이 손을 갖다 댄다거나. 혹은 어깨동무를 하는 그들의 언행을 볼 때마다 드레이코는 산에 방화를 질렀다가 순식간에 얼음물을 내리 쏟은 것 같이 머리끝까지 열이 솟구쳤다가 차게 식어만 가길 수회 반복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드레이코의 심기를 건드려 해종일 여름마냥 예민하고, 삽시간을 오락가락하게 한 흑막은 해리였다. 내가 몇 번이고 불쾌하다는 신호를 보냈건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해리가 드레이코를 오늘까지 몰아세웠다. 까득, 데칼코마니 사이에서 좋다고 웃고 있던 해리의 얼굴이 떠오른 드레이코는 어금니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세게 물고 있던 이빨에 금이 가겠다 싶은 때에 맞춰 드레이코의 귓속에 흘러들어오는 가벼운 발소리는 혼자 있고 싶어 했던 그에게 더한 짜증을 기여했다.
“포터…그리핀도르는 학생이 빗물로 샤워를 할 정도로 물이 부족한 건가?”
복도 저 멀리 작은 점에서부터 서서히 크기를 키워 형상을 드러낸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해리 포터였다. 드레이코의 머릿속에서 비춰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마냥 축축이 젖은 해리 포터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름의 언제나처럼 겉옷 없이 헐렁한 넥타이에 걷어붙인 소매를 보니 전에 드레이코가 했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마른 몸에 딱 달라붙은 셔츠와 바지는 해리의 얄팍한 팔다리 마디마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고, 물에 젖어 늘어진 꼴을 한 벌건 넥타이는 길가에 썩어빠진 꽃처럼 난작거려서 입체감을 상실했다.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니니까 비꼬지 마, 드레이코.”
빗물이 스며들어 둥근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물미역에 비유하고 있을 때 쯤 헐떡거리는 숨을 가라앉힌 해리가 내 이름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 악센트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 둘이 있을 땐 이름 부르기. 해리는 지금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내 모습에 불만을 가지고 눈치를 준 것이었다. 이런 유치한 약속이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첫 만남부터 악연을 이어오다가 이어진 우리였고, 연애 초기부터 꾸준히 유지하던 약속이었기 때문에 해리가 더욱 신경 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해리의 비위에 맞춰주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아마 성장한 외관만큼 자라지 못한 어린 마음이 자신이 화났다는 걸 해리가 알아차리고, 신경 써주길 바라고 있던 것이니라.
“그건 그렇고, 프레드랑 조지는 안 지나갔어?”
“몰라.”
“그럼 론은?”
“지나갔어도 말해야하는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드레이코,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있을 리가.”
해리는 드레이코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지 못했다. 물론, 눈치 더럽게 없는 해리가 대번에 알아채리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나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흠뻑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터는 행동이 무심해서 눈에 밟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리의 언사에 마음이 밟혔다. 안 그래도 위즐리들 때문에 기분이 영하까지 내려가고 있었건만, 그 중심인 해리가 친절히 직접 언급까지 해주니 한없이 바닥으로 침하하는 기분이었다.
하늘의 색을 옮겨 담은 드레이코의 눈동자는 그 차가움마저 옮겨 담았는지 냉랭한 우기도 서려있었다. 드레이코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해리지만 적어도, 자신을 흘기는 눈 하나로 그의 기분이 매우 저조해있다는 점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해리가 가진 마법사의 이성은 무엇보다도 지팡이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집념이 우선이라고 알리고 있었지만, 이는 언젠간 돌려받을 수 있는 확실한 장난에 불구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미지수인 드레이코가 우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나까지 저런 식으로 쳐다본 적이 없었는데. 전례 없는 드레이코의 분위기를 읽고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도 해리가 다시 소지품을 찾으러 가는 발걸음을 돌려 도로 복도로 들어오게 하게끔 만든 요소가 되긴 했지만 순전히 드레이코를 걱정해서 곁에 남았다는 게 더욱 큰 요소였다.
론을 찾고, 드레이코의 토라진 태도를 들을 때까지만 밖에 서있었을 뿐인데도 비에 푹 젖어 복도를 걸으면서 본래의 색을 되찾아가던 셔츠는 도로 회색빛이 도는 투명으로 돌아갔다. 비가 억수로 내리붓는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안경에 묻은 조그만 물방울들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지팡이도 없는데다가 젖은 몸으로는 어찌 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축축하고 찝찝한 상태로 드레이코가 있는 기둥을 서성거리며 밖을 보는 드레이코와는 다르게 상대를 바라보며 셔츠가 젖는 바람에 불편하게 움직이는 팔끼리 힘겹게 엮었다.
“오늘 아침에 우리 기숙사에서 있던 일 점심 때 너한테 얘기해주려고 찾았는데 자리에 없더라. 밥은 먹었어?”
“…보시다시피.”
자극적이지 않고 시답잖은 일상 대화는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간간이 내비춰 유하게 풀어준 다음 화난 이유를 저절로 입에서 뱉게 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보이는 투명한 대화였다. 하지만 해리는 언제나 드레이코가 찾은 답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추측 불가의 인물이었다. 해리는 단지 드레이코가 본인이 들려주는 단조롭고 나른한 일상 대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드레이코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빛이 바래지기 시작한 그 언젠가, 떼를 써서 드레이코에게 별 것도 아닌 대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이 모르는 내가 있길 원치 않았다, 고. 당시나 지금이나 듣기 낯간지러운 소유욕과 질투심에 얼굴을 붉혔던 게 꽤 순진했던 시절인 것 같아 지금은 어떤가 비교하기 위해 순진하지 못했던 며칠 전 길었던 키스를 나눈 날이 멋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음, 괜히 생각했나.
해리의 창백했던 얼굴에 홍조가 일은 모습을 보자 지금 나누던 대화에서 그럴만한 부분이 있었는지 되새겨봤지만 멍청한 롱바텀이 이동 중에 넘어지는 바람에 어깨를 부딪쳐 교과서를 떨어트렸다는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 해리의 미세한 변화는 그리핀도르의 쌍둥이들이 슬리데린 기숙사에서 나오는 걸 발견한 만큼 의심쩍기는 했지만 이 의구심은 자신을 달래는 해리의 목소리에 자신의 미간 주름이 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서 뒷전으로 미뤄졌다. 해리가 가진 스물넷의 시간 중 일초라도 내가 가지게 된다는 것과, 해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상황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부모님께 관심 받으려 일부러 물을 쏟는 철부지 같아 겸연쩍었다. 부끄러움 아래로 위즐리들에 대한 예민함을 수장시키던 중, 참새처럼 입을 바삐 움직이며 재깔이던 해리가 소리를 끄고는 재채기를 했다. 그제야 드레이코는 아무리 후텁지근한 여름이라고 해도 해리가 비에 젖어 추웠으리라는 단순한 흐름을 이해했다. 혀를 차며 코를 훌쩍이는 해리를 훑어보다 이내 빗물세례를 받은 셔츠가 자신의 허용범위 이상으로 투명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햇발이 뜨거운 기운을 땅에 내리 꽂다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금세 자취를 숨기고는 회색 빗물로 땅을 무겁게 만들었고, 햇발과 같이 사라졌지만 꿉꿉한 기운과 거울 같은 웅덩이는 비의 자취를 남겨두었다. 드레이코는 여름이었다. 기분은 빗자루를 타고 위아래를, 최상과 최하를 내달렸다. 다시 미간에 주름을 새기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비를 맞았던 해리와 버금갈 정도로 창백한 제 손을 해리의 왼쪽 쇄골 맡에 갖다 대었다. 이제 막 밥 먹으면서 있었던 사건에 입을 열던 해리는 갑작스러운 온기에 말을 멈추고는 갈맷빛 눈동자를 가만히 정착시키지 못한 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지. 습습한 바람에 식어가던 셔츠는 드레이코에 의해 거머리처럼 살에 달라붙었다. 찬 기운과 따듯한 손이 만나 어정쩡한 온도를 전해주던 것을 어찌 할 바 모르고 침묵을 이어갔다. 드레이코 또한 해리와 같이 모호한 온도를 느끼면서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셔츠가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찝찝한 감촉을 그만 피할까 고민하길 1초. 곧장, 그리고 느리게 손에 셔츠를 그러쥐기 시작하니 느슨하게 풀려있던 셔츠가 팽팽하게 딸려 올라왔다. 이젠 드레이코가 손대지 않은 야릇한 피부까지 셔츠가 달라붙어 가슴께의 돌기를 희미하게 드러냈고, 셔츠 깃에는 여백이 만들어져 그렇게 드레이코가 신경 쓰던 쇄골이 존재를 과시했다, 괜히 시선을 앗아가는 쇄골은 비를 마신 게 아직 마르지도 않아 번들거리다가, 미끄러지는 물방울을 셔츠 속으로 흘려보냈다. 물방울의 시발점은 목이었다. 사슴같이 마르고 곧게 뻗은 목은 쇄골과 똑같은 번들거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리의 피부가 구릿빛이었다면 땀으로 착각해서 건강해 보이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해리의 피부는 매우 투명하고 하얀 편에 속했다. 정염을 일깨우는 걸로 치면 쇄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목까지, 드레이코에 있어 뇌쇄적이었다. 알량하게 튀어나온 목울대를 부단히 바라보다가 침을 삼키는 모습이 어찌나 힘겨워 보이던지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 했다. 때마침 꿀렁이는 구체 중앙을 가로질러 땅으로 추락하는 물방울 덕분에 해리가 부담스러워하는 곳에서 시선을 떨어트려 앙증맞은 턱에 그대로 두었다. 턱 끝에 위태롭게 방울방울 매달린 빗물이 해리가 잘게 떠는 입에 다시 한 번 추락을 감행했다.
“왜 꼴이 이 모양이지?”
“좋은 질문이야 드레이코, 내가 이 꼴로 여기에 온지 5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말이야. …밥 먹을 때 프레드랑 조지가 내 겉옷하고 지팡이를 들고 사라졌어. 론 것도. 그래서 둘을 찾아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은 거고.”
해리는 뒤늦게 자신의 추위를 알아채고, 멱살을 잡은 것 같은 행동을 취한 드레이코에 잠시 눈썹을 들썩였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 근거로 드레이코의 무관심에 절로 비꼬는 말투가 튀어나갔다. 고작 몇 분 전에 일어난 골치 아픈 사태를 곱씹던 해리는 드레이코의 손이 도둑놈처럼 슬금슬금 움직여 자신의 가슴팍에 다다른 장면에 금세 얼굴을 붉혔다. 눈치 없는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는 것도, 무미건조한 스킨십도 스킨십 나름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건 투시하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해리가 이 시선을 느끼는 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사람들에게서 서로의 천적쯤으로 취급되던 슬리데린의 말포이와 그리핀도르의 포터가 단 둘이 이유모를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퍼스널 스페이스에 침범해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장면만으로도 무성한 소문들을 자아낼 텐데,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드레이코는 한 발자국 더 해리에게 침범하며 엄지를 느리게 움직여 가슴에서 돌출된 부분을 쓸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손 떼"
화들짝 놀란 해리가 으르렁거리며 다시 행동을 멈춘 드레이코의 손을 붙잡았다. 수분기가 사라진 손바닥이 드레이코의 손등 위에 감싸지자 그는 자신의 연인에게 위협적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딱하게도 그러한 억압적인 행동은 해리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 드레이코. "
"…."
"그리고 불만이 있다면 지금 말해."
드레이코는 뒤늦게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해리는 귀에 박힌 명령을 무시하곤 여전히 가슴에 올라가 있는 드레이코의 손을 뿌리쳤다. 허공을 가로질러 유영하던 허연 손은 해리의 대꾸에 타격을 받은 듯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뒷목으로 향했다. 입안을 씹은 드레이코는 해리를 감싼 자신의 치졸한 질투를 제 입으로 말한다는 게 패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맥고나걸 교수님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한 말포이 가문의 자제는 당연히 패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길 거부했지만, 지금 갖고 있는 불만을 얘기하지 않으면 해리가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너 안에 다 보여. 이거 분홍색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냐?"
"무,슨 소…"
뒷일이 어떻게 되던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냅다 떠벌렸다. 그와 동시에 뒷목을 매만지던 손을 또 해리의 가슴팍에 올려두며 손가락 사이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티도 안날 유두를 셔츠에 딱 달라붙게 해서 강조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힘에 못 이겨 자신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한 드레이코의 드센 태도에 기가 찬 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소금쟁이처럼 가느다랗게 뜨고는 황당함의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꼴을 하고 위즐리들하고 놀러 다닌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드레이코…우선 내가 이렇게 다닌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알려주지.”
“뭐?”
“너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나를 ‘평범한 남자애’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거야!”
안 그래도 자신의 말허리를 끊어먹은 못마땅한 태도에 발끈한 해리는 저 혼자만 진지한 드레이코를 노려보며 면박을 줬다. 해리는 드레이코가 지금 자신에게 털어놓는 게 질투라는 걸 간신히 알아차렸지만 해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연인이 가진 질투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가 원하는 걸 성취시켜준다는 방법은 납득 불가능이었다. 나에게 마땅한 잘못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죄에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강압적인 태도라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해리의 말 그대로가 실정이었다. 해리가 아무리 비에 젖어 속이 다 비치게 다닌다고 해도 복도에 지나다니는 엔간한 학생들은 드레이코가 알면 화낼만한 생각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귓속말로 수군거리기 바쁠 테고, 그 사이에서 포터가 고백에 차였다는 둥 괴롭힘을 당했다는 둥, 이상한 숙덕공론이나 안 퍼지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음, 프레드와 조지도 그렇겠지만. 단 한 번도, 결단코, 전혀! 서로 연애 감정을 나눈 적이 없다고 확신해.”
딱딱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해리는 이제 자신이 드레이코를 이해시키기 보단 안정시키는 데에만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증거로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억지로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유한 분위기로 끌고 갔다. 이런 자신의 자연스러운 언행을 지켜보던 해리는 문득 자신이 드레이코에게 익숙해짐을 느꼈다. 이따금씩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예민해지던 드레이코를 해리의 이성은 어떻게 다뤄야할지 해결방법을 이미 뇌 주름에 새겨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상황에 따라 해결방안이 변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드레이코가 온순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편한 방법은 평소처럼 다그치기만 하지 않고, 온순한 분위기로 그를 풀어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꽤 쓸모 있는 방식이었다. 조용한 기류에 고개를 살짝 들어 위에 있는 드레이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를 향해 숙여져있던 얼굴에 심란한 기색을 띄운 드레이코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해리의 눈에는 친구와 다투고 나서 사과가 어색해 우물쭈물하는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유사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별반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표본이었던 드레이코 말포이가 자신으로 인해 변한 모습을 보면 어딘가 간질거렸다. 아마 지금 드레이코의 손바닥이 덮여있는 가슴 너머의 심장이…, 드레이코가 지나치게 가깝고, 묘한 스킨십을 여전히 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자마자 간질거리던 심장이 두근거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 해리가 걱정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단지 쪽팔리다는 이유로 드레이코에게 이 박동이 전해지지 말아야했다. 빗소리에 묻혀 심장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질 않길, 엄청난 박동을 느끼고 자신이 더위를 먹어 착각했다고 생각하길 속으로 두 손 꼭 모아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역시는 역시인가 위급상황에만 신을 찾는 건 신도 달갑지 않았는지 드레이코가 긴장으로 인해 더욱 거세진 제 심장박동을 눈치 채고는 복잡한 표정을 그리고 있던 얼굴을 들어 해리와 마주했다. 얼빠진 네 얼굴과 새빨개졌을 내 얼굴 중에 어느 쪽이 더 우스꽝스러울까 저울 재보기도 전에 청진기 역을 하고 있는 드레이코의 손목을 양손으로 감싸 끌어내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리고 그 둘이 그런 감정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난 너 말고 딱히 생길 것 같지도 않거든….”
그러니까 이제 손 떼고 떨어져…. 드레이코는 한동안 해리가 칭한 ‘생긴다.’는 것의 정체에 의문을 갖고 있다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앞의 문장을 대충 짚어보면서 그것이 연애 감정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레이코의 두 눈을 피하는 해리에게선 사랑에 부끄러워하는 소녀도 보이긴 했지만 참을 만큼 참았으니 그만 나오라는 인내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리에게서 손을 거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마자 해리가 입을 열었다.
“웃지 마.”
“웃은 적 없는데.”
“꼴사나운 표정이나 숨기고서 말하지?”
안 봐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해리의 얼굴은 한동안 놀림감으로 써먹을 수 있을만했다. 하지만 표정을 관통당한 건 해리뿐만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내 표정을 해리도 읽어낸 것 같았다. 한껏 풀린 분위기에서의 대화는 이제 아예 둘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사건을 새까맣게 잊게 해주었다. 드레이코는 이미 해리가 단호한 눈으로 현실을 말하면서 안주하기 시작했다가, 지금은 자신 때문에 요동치고 있을 해리의 심장에 기대 이상의 충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 어딘가에서 난데없이 본인의 당당함과 해리에 대한 신뢰도가 쌓이기 시작했다. 당당함에는 유치할지 몰라도, 해리와 관련해서 위즐리 형제들은 불가능 할 것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것이 기반으로 되어 높아만 갔고, 신뢰도는 해리가 여전히 자신에게 설레고 있다는 점이 기반이 되어 드레이코의 마음에 고요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만 갈래.”
“화났냐?”
“미안하지만 나는 누구하고 달라서 화나면 화났다고 내가 먼저 말 할 거야. 멋대로 추측하지 말고, 지금 내 말 잘 새겨듣고. 이 정도면 쉽게 알아듣겠지, 말포이?”
“화난 거 맞네.”
“화난 거 아니라고!”
마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던 해리는 또다시 무심하게 행동하며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이번엔 붉게 색을 칠한 귓바퀴를 찾아서 그런지 딱히 화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털다가 안경알에 튀어 시야를 방해하는 물방울을 제거하기 위해 안경을 빼내 열심히 닦던 해리는 나에게 화난 건지 닦아도,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물기 때문인지 조롱하는 듯한 내 말투에 신경질을 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정말 중요한 게 있다면, 드레이코 또한 해리에게 익숙해져 간다는 점이었다. 드레이코는 해리가 보이는 신경질적인 태도 아래에는 서툰 애정표현에 대한 부끄러움이 깔려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덩달아 열을 내지 않고 학소 할 수 있었다.
째려보는 해리의 시선과 말뜻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화나면 화났다고 먼저 말하고, 멋대로 추측하지 말고.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비꼼이 분명한 말에 드레이코는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조롱으로 맞받아쳤다. 드레이코의 목적대로 해리가 제대로 화를 내기 위해 뿌연 안경을 끼고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는 해리에게 없는 지팡이를 흔들어 그를 보송보송하게 만들었다. 넥타이가 다시 입체감을 득하고, 몸에 붙은 셔츠가 떨어지고, 물미역 같은 머리카락도 다시 새둥지로 돌아왔을 때 해리는 당황하면서도 마법사답다고 무료함을 느꼈다. 해리의 건조한 얼굴 위로 가디건을 내던진 드레이코는 가디건이 아래로 흘러 해리의 얼떨떨한 얼굴이 드러나고, 본능적으로 흘러내리는 물체를 받기 위해 내민 양팔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비 안 맞도록 해.”
해리는 드레이코가 가리키는 게 그의 슬리데린 가디건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확신하며 입는 쪽보단 머리 위에 뒤집어쓰며 가디건이 머리에 직접 닿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양팔로 안감을 받치는 쪽을 선택했다. 쌍둥이를 찾으러 가기위해 밖으로 나온 해리는 비를 맞으면서 아직은 말끔한 안경너머로 드레이코를 마주하고는 여전히 하늘로 물든 눈동자에서부터 시작해서 묘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까지 훑었다.
해리는 쨍한 더위와 습한 우천 이후에 한동안 시원 할 것을 예감했다. 증거로 이미 여름이 상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얼굴에, 입술에 바짝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