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에 묶인 약속
말포이는 여름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장맛비만큼은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빗방울이 부딪히는 불규칙한 소리도, 특유의 빗물 내음도 말포이에겐 꽤 좋은 것이었다, 특히 잔상이 깊이 남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는 그것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한 두 방울 떨어져 얼굴의 선을, 눈꺼풀을 타고 내려가는 물기는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이런 궂은 날에도 어찌나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 다시금 흠뻑 젖어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했다. 오늘은 퀴디치가 어쨌고 비가 와서 시원했다는 등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는 들뜨고 활기찼으며 식기가 부딪혀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대화소리와 함께 말포이의 귀를 간질였다. 그의 옆에 앉은 그레인저는 포터의 푹 젖은 옷과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에 대해 한가득 불평을 하여도 포터는 개의치 않고 퀴디치 연습을 하며 기분 좋았던 것들을 맞은편에 앉은 위즐리에게 말하였고 위즐리 또한 그 대화를 즐겼다.
말포이는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손에 쥐었던 나이프와 포크를 정갈하게 내려놓고는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향하였다. 연회장을 나선 후 복도를 지나던 말포이는 꽤나 굵어진 빗줄기에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칙칙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리는 맑은 물줄기는 더위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오늘 비가 와서 시원했어.’
그렇게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또다시 말포이의 귓가를 울렸다. 그 목소리를 몇 번을 더 되새기던 말포이는 가만히 손을 뻗어 시원한 감촉을 느꼈다.
“그러게.”
한 번도 빗방울을 ‘일부러’ 맞아본 적 없던 도련님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속삭였다. 피부로 스며드는 빗물들이 마치 자신의 깊숙한 곳에 스며든 무언가와 같아서 말포이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 무언가는 감히 단어로는 내뱉을 수 없는 응어리였다.
그래, 그것은 언어로 내뱉게 된다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다만, 어디로 사라져 어디에 남을 것인지는 분명치 않을 감정이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것도 아주, 무서울 정도로 자라버린 꽃봉오리.
너무 늦어서, 혼자 커버린 꽃봉오리.
“…”
말포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순간 아찔하다 느낀 말포이는 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쿵쿵거리는 가슴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 장맛비에 묻혀 그저 그런 소음으로 들리길 바랐다. 어차피 늦은 마음이라면 없는 것이 나았다. 지나는 장마와 함께 사라져버리길 간절히 기도하며, 손가락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방울들을 느낀다. 그 방울들이 꽃봉오리로 흐르고 흘러 결국 꽃봉오리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 비겁하고 치졸한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여느 장마철이 다 그렇듯 끈질기게 내릴 것 같았다가도 이리도 쉽게 물러간다. 눅눅하고 시원했던 날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시금 온도를 높이는 창밖을 포터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망토자락을 흩날리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학생들을, 포터는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해리 혼자서 뭐하고 있어?”
방금까지 옥수수 빵을 한껏 입 안에 우겨넣고 있었던 것인지 아직도 입을 우물거리며 위즐 리가 포터에게 말을 걸자 그레인저는 음식은 다 씹어 넘기고 나서 말을 거는 게 기본적인 예절이자 상식인 것을 모르냐며 그를 타박했다.
"뭐하긴, 애들 구경하지"
"오늘은 퀴디치 안 해?"
"선배들은 시험 준비하느라 바쁘고 우린 더워서 지친다고 오늘은 쉬기로 했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건 그렇고 너 말포이 소식 들었니?"
갑자기 들려오는 이름에 포터가 흠칫 몸을 떨며 그레인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포터를 보던 그레인저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새침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파킨슨이 하도 흥분하면서 떠들어대서 알게 된 건데, 말포이 가 안에서 혼사가 오가나봐. 걔네 집에서 약혼도 안 한 사람이 걔 밖에 없을 테니까 뭐."
"뭐 혼사? 분명 예쁜 애랑 결혼하겠지?"
"글쎄 내가 볼 땐 파킨슨이 아등바등하던데 걔가 될 수도?"
"젠장 생각만 해도 피가 다 식네."
포터는 농을 주고받는 그레인저와 위즐리를 그저 보기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해리, 어디가?’ 하고 묻는 소리는 포터의 귀에 닿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빨리 할 뿐이었다.
포터는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유감스럽게도 알고 있었다. 말포이의 혼사 이야기는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들려오던 이야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래, 그래. 이것은 실망과 두려움이다. 포터의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무력감을 느낄 정도의 실망이었다.
“망할”
포터가 단어를 씹어뱉어내듯 거칠게 말했다. 두 사람은 적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서로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뒤로 포터는 항상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 선을 그었다. 그저 지나가는 감정이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문제되고 있진 않았으리라. 포터는 혼란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들을 언어로 형상화 시킨다면 어떤 균열이 생기고 어떤 애정이 생길까, 포터는 두려운 것이다. 내뱉는다면, 인정한다면 그것들에 더 애착이 가고, 더 막막해질까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시해야했지만 말포이의 혼사 이야기는 무뎌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후덥지근하기만 한 날씨에 더욱 머리가 어지럽다.
**
말포이는 잠을 이룰 수 없어 무작정 기숙사 밖으로 나와 빈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하고 교단 위에 걸터앉아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에 말포이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지만 가만히 그 무게를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느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해지는 자신의 대한 가족의 기대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원치 않는 혼사, 그리고 부모의 주인이자, 자신의 주인이기도 한 ‘그’의 명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소년을 사랑하는 자신이, 말포이는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한 번 인정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감정이 그를 향해 밀고 들어온다. 암녹색의 투명한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그동안 생각했던 자신의 입장 따위는 별개가 되어버리고 오로지 자신과 그 소년만이 남는다.
“‥‥말포이?”
들려오는 소리에 말포이가 당황하며 고개를 들자 방금 전까지도 눈앞을 아른거리던 모습이 드러났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그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에는 녹음이 담겨져 있다. 절대로 섞일 것 같지 않던 두 색은 의외의 조화를 이룬다.
“너도,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야 많겠지. 안 그래?”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던 포터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말포이를 내려다보다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지금은, 필요 없어. 한층 더 낮고 짙은 목소리로 빈 교실을 잔잔히 울렸다. 그 대답을 되새기던 말포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서로는 몰라보게 자라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있었다. 말포이도, 포터도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고 나면 호흡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다. 늘 그래왔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서로를 눈에 담는다. 짧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마른 입술 위로 부드러운 것이 겹쳐진다. 천천히 손을 들어 서로 다른 손가락이 얽혔다. 맞잡은 손과 닿는 호흡의 온도는 더워져갔다. 마치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애달픔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열정적이고 부드러우며 조심스러웠다.
맞닿은 둘의 입술에는 여름이 내려앉았다. 아주 덥고 뜨거운 여름이. 이것이 두 사람의 언약이며 맹세임을, 지독한 굴레임을 여실히 깨닫는다.
어느 여름날 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두 소년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