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실 그 어떤 것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죽고 난 후 우리는 늘 겨울이면 호그와트를 향했고 평화는 마치 들판을 하얗게 물들인 눈처럼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자박자박하게 쌓여있었다.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한 건 아마 저뿐인 듯 했다. 녀석에게 무언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는 그 순간부터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학교는 꾸준히 나왔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레이코”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리는 얼굴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해리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가만 눈을 맞추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린 뒤 다시금 몸을 돌려 제 길을 가버리는 녀석의 모습에 결국 해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해리는 스스로 픽 웃어버렸다. 자신이 뭐라고, 드레이코에게 무슨 일이 있냐. 애초에 그런 것들을 살뜰하게 물을 사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그를 잡았다. 어떤 용기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 용기를 향해 돌아온 건 날카로운 화살뿐. 그랬다. 해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늘 그런 식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또 모르면서도 아는 척. 그게 연신 우리가 써왔던 방식들이라는 건 아마 너와 내가 지켜왔던 암묵적인 약속처럼 이어져 왔다. 해리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선 가만 생각에 빠졌다. 기실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이 문제를 저 자신이 정말 풀 의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호그와트는 해리에겐 그저 새삼스러운 것 뿐이었다. 무섭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던 기나긴 전쟁의 끝은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평화뿐이었다. 이런 단조로운 삶들이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허무했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옭아왔던 그 존재가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또 다른 속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다른 이들과는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제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 건 다름 아닌 백색 금발에 잿빛 눈빛을 가진 사내, 누구라도 알법한 사내의 낯에 해리는 아무 말 없이 가만 그를 바라봤다. 확실히 무언가 뱉어낼 말이 있는 듯 머뭇대던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해리에게 있어 그 날은 마치 갑자기 내린 소나기만 같았던 날이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뜨거운 여름 날, 갑작스레 내려 아스팔트를 차갑게 식혀주는 그런 소나기. 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갑작스러운지 채 준비하지 못한 우산을 떠올릴 새도 없이 그저 멍하니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게 드레이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해’
갑자기 내린 소나기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고 예고도 존재하질 않았다.
‘나도 내 감정이 믿기질 않아. 근데.’
그래서 더욱 갑작스러웠던 소나기는
‘네가 좋아. 좋아하고 있어, 널.’
마치 제 온 몸을 적시려 작정이라도 한 듯 부러 비에 다가가지 않아도 바람에 흩날려와선 흠뻑, 저를 있는 그대로 적셔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애초에 드레이코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일말도 염두 해두지 않은 해리였다. 그래서일까, 혹시 이게 장난은 아닐까 싶어 화까지도 났던 밤을 보낸 해리였다. 하지만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드레이코는 그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건 슬리데린 기숙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궁금한 것들 투성이였다. 정말 저를 좋아해 고백한 건지, 아니면 저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는지, 저를 정말 좋아하는 거라면 왜 그리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지. 하지만 차마 그 어떤 것도 물을 수 없던 이유는 일종의 객기였다. 그에게 조금도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호그와트에서도 졸업을 앞둔 제 나이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생각들이 얼마나 어린 마음인지 해리는 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 아집을 굽힐 수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제 부름에 그저 아무런 감흥 없는 눈빛으로 한번 슥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들이 답답했다. 해리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 잿빛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그 속에는 또 무엇을 숨겨놓고 있는지. 자꾸만 뱅뱅도는 생각의 쳇바퀴는 결국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며 제 길을 그만 두고 말았다. 해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안경을 벗어선 손 끝을 이용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그대로 이불 속으로 푹 파묻혔다. 그래, 그래. 인정하자. 제일 궁금한 건 다름 아닌 단 하나라는 걸.
적어도, 네 고백이 진심이었는지. 오로지 해리의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
어느덧 눈이 녹았다. 꽁꽁 얼어있던 호그와트는 서서히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뜻은 모든 학생들이 곧 집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큰 가방 안에 모든 짐을 싸고 기숙사를 둘러봤다. 학생들이 많이 비어 홀로 쓰던 방이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그대로 가방을 집어 들곤 방을 나서던 순간 해리는 제 발치로 보이는 하나의 종이에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조심스레 펼치자 그 안에는 한 구절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Now fades the glimmering landscape on the sight,’
가물거리는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해리는 웃음이 터졌다. 제법 드레이코 다운 발상이었다. 선뜻 내린 결론이 제법 독단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방 앞에, 이렇게 절절한 문구를 가져다 놓을 사람은 드레이코 뿐이었다.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해리는 정말로 웃겼다. 자신과 드레이코가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렇다 저렇다 할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젠 정말 무어라 명제를 내려야 할 사이가 된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게 싫지 않아서.
해리는 가만 보고 있던 작은 쪽지를 제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뒤 조금은 개운한 마음으로 호그와트를 나섰다. 그간 미묘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정리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는 기실 해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생겼을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헷갈리는 것 따윈 없다는 것이었다.
시리우스가 자신에게 남겨준 대저택에 도착하자 언제나 그렇듯 듣기 싫은 소리를 궁시렁 대는 크리쳐가 있었다. 자신을 보고도 살갑게 굴지 않는 그 모습이 그 어떤 감흥도 생기질 않았다. 그저 제 방에 누워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번 방학은 머글세계에서 뭘 해야 하나. 시간이라도 채울 겸 아르바이트나 할까 하다가도 이내 이 뜨거운 여름에 나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마자 제 시야에 가득 들어찬 건 드레이코였다. 깜짝 놀란 해리는 번뜩 눈을 뜨며 그대로 몸을 일으켰고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살폈다. 자신에게 무슨 주술이라도 걸어놓은 건가 싶었지만 그렇게 마법까지 걸어놓을 정도로 두 사람이 붙어있던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해리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이내 다시 누웠다. 다시 또 아무 문양도 없는 천장을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가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어느덧 잠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해리는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탁자 위에 빵과 우유, 그리고 몇 개의 편지들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크리쳐가 가져다준 걸까. 악담을 퍼붓긴 해도 정은 있는 녀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해리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맡 의자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도착한 편지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루나에게서 온 편지도 있었고 론, 헤르미온느에게 온 것도 있었다. 차례대로 모두 읽은 뒤 마지막 수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편지를 보자마자 해리는 이상하게 두근대는 심장을 느껴야했다. 왜 이래. 답답함에 주먹을 들어 콩콩 가슴팍을 찧어댔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색을 않는 심장을 해리는 그저 모른 척 하며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leaves the world to darkness and to me.’
그리고 그 안에 짤막하게 적혀있는 문구는 제법 절절했다. 이 곳엔 어둠과 나만이 남는다. 한참을 그 문구를 바라보던 해리는 아, 하는 작은 탄식을 뱉어낸 뒤 이내 다시 또 웃음이 터졌다. 처음 받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웃음이었다.
보고싶다는 말을 이리도 돌려 말하는 드레이코. 드레이코 말포이.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해리는 머릿속에 온통 궁금증이 일었다. 단순히 궁금증이 일어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에 한 번은 꼭 이렇게 의미 모를 문구들을, 아니. 조금만 돌려 생각하면 바로 이해 할 수 있는 문구들을 보내는 드레이코에게 해리는 그 어떤 답장도 보낼 수 없었지만 차곡차곡 그의 마음들을 서랍 속에 쟁여 놨다. 그와 동시에 제 가슴속에서 어느덧 차곡차곡 쌓여가는 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건 결코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 쌓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리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렇게 넌, 온전히 내 여름이 되어버렸다.
